그리스 철학과의 만남: 하느님의 본질과 고유성에 관한 가르침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왕성하게 선교를 하면서 주변의 세계와 적극적으로 논쟁과 대화를 펼쳐나갔다. “護敎論者”라고 일컫는 2세기와 3세기에 활동하던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주위의 세계에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들 시대의 개념과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에는 그리스 철학이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에 그리스 철학의 개념과 언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당한 공격에 대처한다는 좁은 의미의 ‘호교론’(apologia)은 2세기와 3세기 초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주요 논점은 그 당시의 철학적 가르침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3세기 중반 (신) 플라톤 사상이 거의 보편적인 철학의 위치를 차지하자 대화의 형태도 변화되었다. 즉 지배적인 사상인 플라톤 철학에서 그리스도교와의 연결점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교회의 호교론자 그룹에 속하는 이들로서는 유스티노(Justinus+ 165년경),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Theophilus, +186), 사르데스의 멜리톤(Meliton,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215년 이전), 리용의 이레네오(Irenaeus, +202), 오리게네스(Origenes, +254년경), 안티오키아 학파의 창시자 루치아노(Lucianus, + 312)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 전하는 야훼 하느님은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으로서 그리스 철학이 탐구하면서 찾던 바로 그 하느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야훼 유일 신앙이었다. 즉 모든 시대, 모든 곳, 모든 민족에게 오직 한분의 참된 신만이 존재한다는 확신이었다. 호교론자들이 그리스 철학과의 대화에서 연결점으로 삼은 것은 과연 무엇이 참으로 신적인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이 물음은 그리스 철학에서는 실상 이미 오래전에 제기되었던 물음이었다. 즉 이 물음은 그리스 철학이 평범한 日常事에서 여러 신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았던 대중신앙과 겨루던 가운데 생긴 물음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신들의 공통성을 찾기 시작하였다: 여러 신들은 “신적인 것”을 지니고 있을터인데, 그러면 이 신적인 것의 기본구조 혹은 본질은 무엇인가?

대중신앙은 신들이 일상사의 근원이라고, 즉 신적인 것은 바로 근원일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다. 이는 “逆推論”(Umkehrschluß)적 사고와 유사하다: 일상사에서, “평범한” 체험에서 시작하여 신의 본질에 관하여 거슬러 올라가며 묻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소트라테스 이전에(기원전 7세기부터) 등장하였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cosmos)에는 의미가 있는 질서가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서 세상의 근원에는 계획을 세우는 영이 자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나중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이와 유사하게 주장하였다). 이런 역추론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의 근원 자체를 탐구하는 질문을 가능케하면서, 참으로 신적인 것은 모든 실재의 필연적인 근원이라고 인식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은 그리스철학은 이른바 (기원전 79년에서 기원후 40년 사이에 형성된) 중기 플라톤 철학이었다. 이 철학에서 근원(arche)에 대한 물음은 계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하게 숙고되었다. 근원이 여러 개라는 생각은 배제되었는데, 왜냐하면 다수의 근원은 차이를 내도록 하는 근원 혹은 기원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근원이 기존의 다양성을 근거지우는 것으로서 그 뒤에는 다른 근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근원은 무제한적이며 불변적인데, 왜냐하면 제한이 있다거나 변한다는 것은 다시금 그 “뒤에” 있는 최종적인 근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그리스철학은 그리스 대중종교의 다신적 신앙에 강력히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철학이 명확하게 성서적 유일신 신앙과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경험세계로부터 추론을 통해서 찾은 “신적인 것”은 성서적 의미의 인격적 신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역추론적 사고를 통해서 이르게 된 최종적 근원에는 여러 가지 고유한 특성을 부여된다. 최종 근원은 숫적으로 하나, 혹은 하나 그 자체, 一者(to hen)일 수밖에 없는데, 이미 플라톤은 이를 존재 혹은 선 자체와 동일시 하였다. 즉 최종 근원은 변화하는 우리의 체험세계의 변화하는 다수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인 최종적 근원은 우리의 경험세계의 다양성과는 사뭇 다르게 생각될 수밖에 없기에 결국은 항상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머무른다. 즉 사고를 통해서 그것을 정의하며 파악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적 사고에 의하면 체험세계는 가시적인 사물, 즉 물질적인 것들이 합하여진 것이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움직임에 종속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변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그것들의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한계가 없는 최종 근원은 이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서 움직임이 없고, 비물질적이며 불변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영적이다. 플라톤적 사고에서는 우리의 인식능력은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최종 기원은 개념적으로 단지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을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고를 통해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과 비교하고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접근방식으로 세상을 질서지우는 이성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이성이 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세계가 변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우리가 체험하고 관찰하는 사물들이 합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한다. 합성된 사물들은 다시금 해체될 수 있다. 이 물체들의 뒤에는 무엇인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사물이 합성되도록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합성체의 최종 근원은 순수해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물들이 여러 부분으로 합성되어 있기에 그 부분들을 비교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순수한 것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가 않다. 신적인 것은 극도로 순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파악될 수 없고, 기껏해야 어렴풋하게 짐작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사고 과정을 거쳐서 얻어낸 신의 특성은 자유로운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필연적 성질의 것이다. 즉 신이라면 이러 이러한 구조와 고유성을 지녀야한다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고유성들은 신이라면 필연적으로 갖출 수밖에 없는 본질적 고유성(Wesenseigenschaften)인 것이다.

(후기의)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는 추론적 과정이 야훼 신앙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몇 구절(지혜 13장; 로마 1,18-20)들이 나타난다. 즉 체험할 수 있는 창조계에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이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자(호교론자)들은 여러 측면에서 중기 플라톤 사상과 연관을 맺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사상을 체계를 통채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호교론자들에게는 창조에 관해 숙고하는 데에 있어 그리스 철학이 최종 근원, 혹은 모든 사물의 근원은 오직 하나라고 강조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런 생각은 그들의 유일신적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또한 주변 세계에 적지 않았던 이원론적 사고를 물리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즉 당시에 창조계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벌리는 거대한 싸움터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성서적 유산에도 하느님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생각이 그리 멀지는 않았다: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보면, 세상의 시작에 하느님과 창조되지 않고 꼴을 갖추지 않은 물질이 공존해있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리스적 유다교에서는 자칫하면 이런 시각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하느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2마카 7,28 참조). 그리스인들을 통해서 이런 확신은 더욱 명확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유일하고 다른 모든 사물들의 최종 근원이라는 것은 신개념에 속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중기 플라톤 사상이 신을 영적이며 파악불가능한 존재로 생각한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들은 이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신에 대한 이런 저런 명칭은 단지 ‘비교적 방식으로’ 적합할 뿐 신은 ‘본래적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수용하였다. 적합한 명칭은 항상 비교에서 나오는 것인데, 신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식을 낳은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이)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항상 그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누구도 신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신에게 마땅한 이름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 당시의 플라톤 사상에 동의하였다: 하느님은 표현하기 어렵고 이름이 없다.

그리스도교와 플라톤 철학 사이에 커다란 일치점은 신의 불변성(不變性, incommutabilitas)에 대한 고찰에서도 드러난다. 불변성은 근원이 지니는 속성으로 생각되었다. 즉 변하는 것은 항상 무엇에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끝이 있다. 모든 것의 근원은 시작과 끝이 없어야 하고 그러므로 – 합성된 것이 아니기에- 변함이 없다. 여기에서부터 신은 고통을 당할 수 없다는 견해가 도출되었다. 고통이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하며 상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외부로부터 오는 영향을 받아 변화될 수 없기에 -그렇지 않다면 이미 신이 아니다- 고통을 당할 수도 없다. 초대교회 신학은 이런 無感動性(απαθεια)이 아주 중요한 신적인 속성이라고 간주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신앙인의 길이 하느님을 닮는 길이라면, 이 길의 목표는 항상 고통에 둔감하고, 냉정하고, 침착하고 무감각하게 되는 데에 있다.

그리스 철학과 대화하면서 신이 어디에 존재하느냐는 문제도 논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신은 결코 무엇에 포괄(包括)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포괄되는 존재는 포괄하는 것보다 열등하고 그렇기에 신이라고 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포괄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신에 의해 포괄되고, 그래서 신이 알지 못하고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신의 앎이란 바로 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의해서 포괄된 것 안에서는 신의 뜻없이 발생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통찰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알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신의 先-見(Vor-sehung) 의해 지탱되고 긍정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이런 사변적인 길을 통해서 이미 스토아 철학이 주제로 삼았던 변신론(辯神論. theodicy)의 문제에 이르게 된다.39)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악 또한 하느님의 뜻에 포함되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되는데, 변신론은 세상의 죄나 악 또한 하느님의 뜻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신의 속성(善, 全能, 正義)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그리스 철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간의 대화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추상적인 신관념의 자료를 마련하였다. 이런 신관념에 따르면 신의 아주 순수한 본질은 모든 완전성의 총괄이라는 것이다. 본질상 순수한 존재인 신은 혼합되어 있지 않고, 불변하며, 감각적인 성질을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신은 전혀 특성이 없고 형태도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의 이러한 순수한 본질을 근거로 두 가지 방향이 형성된다. 그 하나는 신은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신과 관련해서 인간 세계의 특징인 합성, 변화 혹은 시간을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배제하게 되어서, 저명한 그리스 신학자들이 주장하였던 것처럼 신의 표현불가능성, 탐구불가능성, 無限性, 초월성을 강조하게 된다. 교부시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행동에 관한 표현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의 본질은 긍정적 서술이나 부정적 서술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완전성의 생각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잘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신에게 부여한다. 이 경우에 신의 無限性이란 ― 예를 들어서 “카파도치아인들”이라고 명명된 그리스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 한계없는 충만이라는 의미로서 이해되었는데, 이런 충만에는 자신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를 전적으로 알릴 수 있는 특성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고대교부들은 그 당시 주변의 중기 플라톤 사상의 초월적인 신 관념을 귀중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즉 플라톤 사상은 유일신 사상만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느님의 超세계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이렇게 고대교부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개신교 신학자 하르낙(A.Harnack, 1851-1930)이 비판하듯이 “그리스화”(Hellenisierung)된 것40)은 아니다. 즉 그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이해를 견지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인간과 역사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자유롭게 행동하신다는 측면에서는 그리스 철학과 아주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신은 본질상 필연적으로 불변의 상태로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교부들은 하느님을 무한한 자유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하시는 분, 세상, 물질,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강한 관심을 지닌 분으로 이해하였다. 하느님의 이런 자유롭고 인격적인 행동은 인간을 神化시키기 위해서 하느님 스스로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육화에서 정점에 이른다. 바로 이런 계시, 즉 하느님의 본질을 알려주는 교환의 사건에서 하느님의 참된 자기 계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 특히 영지주의적 사고에서는 이런 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고대 그리스도교 신학은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철학 체계보다는 근본적으로 우위에 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교부들은 하느님께 대한 일관된 시각을 형성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즉 철학적 신 개념과 성서적 하느님 이해가 조화되지 않고 단지 병립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세상의 근원으로서의 신의 모습은 잘 표현되었으나, 성서가 증언하듯이 인격적이고 생동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 모습은 불충분하게 드러났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여러 가지 술어의 해석에서 드러난다. 교부들은 하느님은 영원하시다고 묘사하였지만, 그 “영원성은 성서적 의미로서의 강력하고 생동적으로 모든 시간에 해당되는 同時性이라기 보다는 플라톤 철학적으로 無시간성으로 이해되었다. 하느님의 無所不在는 성서적으로 세상에 대한 전능한 지배권이라기보다는 우주에 상태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善하심은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롭고 사랑에 가득 찬 은총의 돌보심이라기보다는 선의 자연적인 放散으로 이해되었다. 하느님의 정의는 성실하게 하느님의 약속과 계약에 뿌리를 둔 구원의 정의라기보다는 성과에 따라 서 상벌하는 정의, 시간을 초월한 질서관념에 근거를 둔 정의로 이해되었다. 하느님의 파악불가능성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相異性이라기보다는 無名의 세계 근거가 추상적이고 특성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었다”.41) 하느님이 인격적이고 살아 계신 분이라는 성서적 관점이 그리스 철학의 靜的인 신 개념 때문에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이런 정적인 신 개념은 그리스도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하느님은 불변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는데, 이런 신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 안에서 사람이 되신 성서의 하느님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플라톤 철학에 따라서 신은 초월적이며 무감각한 존재라는 것을 고집할수록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했다는 것과 그의 신성을 조화하는 데에 극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 편에서는 성서가 분명히 증언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이 진정한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에비오니즘, 養子論, 아리아니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철저히 갈라놓아야 한다(네스토리아니즘)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성서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명백하게 증언된 것을 강조하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고난을 받았음을 부인한다(假現說, 樣態論, 아뽈리나리즘, 單性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