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무엇이 의회전술인가? 의회전술이 무엇인줄이나 알고 볼세비키의 전술을 가져다가 붙이는 것은 자신들의 계급적인 속성을 좀더 좌 쪽으로 이동하고픈 욕망에서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똑똑하다라고 선전하고픈 이유에서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민주노동당이라는 계급의 속성은 쁘띠부르조아 집단이라고 그렇게 비판을 해주엇건만 아직도 그 안에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한다면 멋진남으로 불릴 수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노동해방실천연대동지들 동지들은 노동해방의 뜻을 알고 그뜻에 맡게끔 노동자계급의 사상을 제대로 선전하고 있는지, 선전을 하고 있다라고 자신을 한다면 본인의 글을 비판 해 보아라.

동지들이 주장하듯이 “일간지 형태에 대중적으로 배포되는 <프라우다>를 통해서 볼세비키와 볼세비키 의원단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던 것이다. 의원단이 연단에서 짜르 체제의 비민주성과 인민의 생활고를 폭로하고 노동자 빈농의 요구를 주장하면, 곧 <프라우다>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라고 하면서 프라우다의 역할로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가 되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지하게 잘못된 판단이다. 기술적인 이유로 표현되어지기는 했지만 진정 그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체제내에서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의회를 이용하여 차베스나 모랄레스처럼 정권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ㅡ 하지만 볼세비키같은 의회전술을 쓰면 자신들의 계급적인 입지가 약해지는 관계로 그렇게는 못하고 ㅡ 의회 내에서 부르조아의 언론이라도 이용을 하면서 대중들의 표를 얻고자 헌신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12월 8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비대위원장과 단병호의원이 기간제사유를 확대하는 수정의견을 제출하고 전재환 민주노총비대위원장과 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의 동의를 얻은 후 단병호의원이 법안소위에서 수정안을 제출한 ” 것이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인가? 잘못된 것은 없다. 오히려 동지들의 비판이 잘못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사고방식을 그들의 존재에서 인정하지 못하고 개량주의정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량에 일부봉사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당신들의 잘못인 것이다.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만들 수 있다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럴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다. 부르조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경우는 혁명의 시기에서 이중 권력을 가진 경우에 한하며, 그 외에는 현실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는 의회전술은 기본개념은 2012년의 수권을 목표로 남미의 자칭 좌익정권의 창출로 고무가 되어 자신들도 잘만하면 할 수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중간에 서서 자신들의 두팔로 저울질하고 두 계급간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고분 분투하면서 타협과 협박을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세를 불려나가고자 한다. 이들의 목적은 피지배계급의 권력창출이 아니고, 자신들의 권력창출이기 때문에 의회에서의 활동이 부르조아 언론의 힘을 필요로 한 것이고, 농민이나 노동자대중의 장외투쟁에서는 자신들의 힘을 지배계급에게 과시하고자 하기 위한 제스츄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중의 힘은 장외 투쟁에서가 아니라 표를 통하여 자신들에게 밀어만 준다면 더욱 더 정치적인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배계급에게 협조와 타협 그리고 조그만 협박으로 일관된 자신들의 보수적인 계급에게보다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민주당, 독일의 사회당 등등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들이 연재 국회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자신들의 계급적인 모습이지, 그들이 볼세비키적인 투쟁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그 안에서 함께 놀고있고 얻어먹을 게 있어서 붙어지내는 전진과 노동해방실천연대 등등의 조직원뿐이다.

그럼 지나가는 글이지만 혁명적인 사회주의진영에선 의회를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이번 기회에 한번 확인을 해보자. 사회주의자들의 의회활동은 쁘띠부르조아계급간의 활동에서의 차이점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사회주의자들은 현 지배체제 틀 안에서의 개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해방이 아니며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의 첫걸음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면서 의회라는 활동은 노동해방이라는 길로가는 하나의 기술적인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를 한다. 즉 하나의 투쟁방법이지 그 목적이 아닌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파업, 무장봉기, 가두투쟁, 선전선동 등등의 한 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투쟁의 방식중에서 특수한 형태이기 때문에 방법이 다른 방식과는 다르게 표현되어져야 하겠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봉사를 해야함은 엄연한 사실이다.

의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부르조아계급이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 권력 분리를 주장하고, 그 중에서 입법권을 가지고 행정부나 사법부를 일정정도 감시하기 위한 장치이다. 특별한 물리력을 가지고 있거나, 사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관은 아니며, 대중에게 그나마 공개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완성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한국사회에서는 4년에 한번 선거를 통하여 입후보자를 의회에 보내지만 보내고 난후에 그들을 통제할 어떠한 권한을 주지 않는 관계로 – 실지로 주었다라고 해도 별차이는 없다. 탄핵 소추를 국민이 한다고 한다면 언제 누가 하겠는가? 그들에겐 이득이 오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것도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대행기구를 통해서 할것인 관계로 더욱더 자본의 논리에 휘말려들어 가는것이기 때문에 피차 마찬가지다. –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만을 찾아 떠돌아 다닐뿐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회라는 기구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종사하는 도구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이며, 이 자본가계급이 의원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상태에선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원들의 활동은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의원들의 활동은 의회 내에서 입법 활동을, 의회 밖에선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한 작업을 주로 하는데, 실질적으로 부르조아계급의 의원들의 힘은 의회 내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의 힘이 누구의 힘인가? 바로 지배계급의 힘이며, 지배계급의 힘은 의회 밖에서 찾아다닐 필요가 없으며, 부르조아의 지배체제를 굳건히 하기위한 법을 제정하여, 대중의 투쟁에 발목을 잡고, 더 나가 그들을 볼모로 하여 자신들의 사상과 주도권을 퍼뜨리며 자신에게 한표를 더 찍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앞길을 닦는데 이용을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의회가 하는 일이며, 의원들의 생활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충실하며, 타에 모범이 되고자 열심히 의회에서 몸싸움도 건강 삼아하고, 스트레스도 풀기 위해서 큰소리로 떠들고, 가끔 신선항 공기를 맡기 위해서 장외로 나가서 놀기도 한다. 그래야 만이 더욱더 많은 자본이, 후원금이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져 자신의 자손 대대로 먹고 놀수 있는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노동자들은 이런 의회에서 자신들의 힘을 기를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힘은 투쟁하는 피지배계급의 현장에 있으며, 의회 내에서의 법적인 공방은 오로지 부르조아 계급내의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관계로 의회 밖에서 노동자대중들과 함께 투쟁의 대오를 가져가기 위해서 고분분투를 한다. 부르조아의 지배도구의 하나인 의회에서 그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넓어진 선전 선동 공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현시기 언론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곳이 부르조아 언론이라면 그 언론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이용하는 것이 옳바른다.

“버너데트 데블린이 북아일랜드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됐을 때 그녀는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전국을 돌며 노동자들에게 보수당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이라고 호소했다. 1972년 데리에서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하원의장은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하원 회의장을 가로질러 가서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레지널드 모들링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TV 인터뷰에 등장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심의 의원 자격을 이용해서 북아일랜드 가톨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의 분노를 대변했다.”(21세기 사회주의 p21)

동지들 무엇을 느끼는가? 부르조아언론에게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것이 잘못되엇다는 것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가. 피지배계급을 대변한다는 것은 이미 지배계급의 물량에 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피지배계급은 어떠한 경우라도 지배계급의 물적인 토대를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 한다. 이용 할 수 있는것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쁘띠부르조아의 자존심일 뿐,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그런 자존심은 사치이다.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핵심은 의회의 환상에 대항 할 수 있는 곳은 노동자 투쟁의 현장이고 의회 밖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원들이 의회라는 회기에서든 아니든지 피지배계급과 함께 투쟁의 현장 속에서 존재한다면,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하는 높으신(?)분들을 기억 할 것이며, 그 기억 속에서 사회주의의원들이 선전 선동하는 자본주의철폐투쟁에 관심과 애정을 쏟을 것이며,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라는 점을 경험을 하면서 높은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의원들의 투쟁의 현장에서 우리는 쁘띠부르조아계급의 환상을 피지배계급에게서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며, 솔직히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대중들의 계급의식과 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한 경험은 현 시기에선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사상으로 무장된 의원들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의회투쟁에서의 직면한 문제는 의회주의 환상인 부르조아적 편견과 관념에 찌들어 잇는 피지배계급을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며, 무엇에 복무시켜야 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볼세비키들은 두마에서 독자 법안을 제출하고 의회 연단을 적극적인 선전선동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동시에 의회 밖에서 전개되는 투쟁에 의원단이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할 것은 볼세비키 의원단은 법안은 발의했어도 절대로 입법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멘세비키가 입법 활동에 참가하자고 의원단에게 호소하자 레닌은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볼세비키 의원들은 레닌의 이 충고를 따랐다. 그 이유는 명분과 실리 두 가지 모두 때문이다. 자본가계급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는 명분도 지킨 것이요, 어차피 원내 소수 세력인 볼세비키로서는 입법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리도 챙긴 것이다.”

글을 쓴 김백선동지는 심한 착각을 하고 있다. 명분과 실리를 챙기기 위한 볼세비키의 투쟁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볼세비키가 다수가 되었다면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개량을 위한 입법을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였던 볼세비키는 대중들에게 의회의 환상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의회의 계급성과 피지배계급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의회내가 아니라 의회 밖에서 함께 투쟁의 대열에 동참을 했으며,이러한 투쟁 속에서 더 많은 공간, 더 적어진 제약을 이용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확대에 힘을 써왔고, 그 기술적인 부분을 프라우다가 해주었던 것이다. 프라우다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투쟁을 한 것이 아닌 것이다. 무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운동에 도움이 안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채 하면서 대중에게 오염된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은 쁘띠부르조아자들의 몫이다.

“볼세비키, 의원단의 오류를 당이 정정할 줄 알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의원단 동지들의 사상을 부르조아의 물리력에 훼손당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들의 사상을 대중에게 퍼뜨릴수가 있었는가? 동지는 아는가? 그것은 강력한 사상적 이데올로기만을 가지고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해주고 조율해주는 지역구 및 중앙에서의 지침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사상을 때마다 계속해서 검증 받아 왔기 때문인 것이다. 지배계급의 물적인 공세는 왠만한 성이라면 언제든지 초토화시킬 수 있는 것이기에 특정한 또는 지명도가 있는 동지들을 합법적인 공간에 투여하기보다는 당의 이름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언제든지 높여줄 수 있는 젊고 때묻지 않은 동지들을 규합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의원단의 정체이다.

“의회그룹에 대한 결의안은 중안 위원회가 (1) 누구를, (2)언제, 그리고 (3) 어떠한 근거로 국가 두마에서의 당의 대표자로서 인정하는가를 모든 당 조직들에 알리라고 중앙 위원회에 지시한다. 더 나아가, 중앙위원회에 의회그룹의 활동에 관한 정기적 당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하며, 마지막으로 그것은 국가두마의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이 소속한 그러한 노동자들의 조직들에게 이 의원들에 대한 특별한 통제를 행사할 의무를 부과한다.”(레닌저작집 4-1 전진출판사 p272 국가두마의 노동자 그룹 중에서)

이것이 바로 의원단이 활동했었던 볼세비키의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사회주의자들의 방식일 수뿐이 없는 것이다. 동지들이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의 혁신 방안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지들의 꿈이겠지만! 동지가 주장하는 것과는 확연히 틀리지 않는가! 노동해방실천연대동지들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관점조차도 없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바꾸어버리는 아주 처절한 시도는 혁명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고 개량주의정당과 함께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버리고 쁘디부르조아로 가고자하는 욕망의 한 표현이다. 동지들은 이미 사회주의를 떠들 필요는 없다. 동지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2012년의 정권창출이 동지들의 바렘이요, 희망이며, 지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동지들의 노동해방의 첫걸음이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현장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발전을 위한 사료들을 끄집어내게 된다. 이미 역사 속에서 많은 자료들은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만 하는것인가를 명료화시킨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배운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의회라는 테두리 속으로 끌어들일려는 여타의 행동은 투쟁의 힘을 높이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명망가들을 찾아서 우리의 입장을 지지해 달라고 아부하지말고 대중의 선도에서 함께 투쟁을 하면 그들은 우리의 입장을 공유하고자 하면서 명망가라는 허울보단 계급의식이 강한 또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조직의 이름을 가지고도 충분히 견인하고, 이끌어 가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안된다는 스스로의 패배 의식 속에서 쁘띠부르조아의 이데올리기에 흠뻑 빠진 나머지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져 일 이년에 끝나지 않을 기나긴 혁명의 일정에 조바심만 남아서 정신을 부르조아에게 팔아 넘기는 작태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의회라는 투쟁의 공간은 계급투쟁에 복무해만 하는 특수한 형태일 뿐이다. 다른 새로운 형태의 길이 아니며, 또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부르조아 계급의 지배도구의 일형태인 것이다. 쁘띠부르조아들의 계급은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혁명의식에서 조차도 의회 내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환상을 퍼뜨리며 대중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하며, 그 한국적인 모델은 작금의 민주노동당의 모습에서 파견근로자의 법안 문제라든지, 이라크 파견연장안의 문제라든지, WTO의 법률문제라든지 하는 현안에서 그들은 대중의 투쟁의 현장보단 따뜻한 실내에서 해결하고자 노력을 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들의 존재는 자신의 행동속에서 계급적인 모습이 그대로 투영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을 매고 있으니 죽은 자식 부랄을 만지는 격이다. 노동자대중의 투쟁이 동지들의 패배의식 속에서 살아 숨쉴 때, 동지들은 쁘띠부르조아 품속에서 따뜻한 겨울을 지내고 있다. 동지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인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쁘띠부르조아의 환상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전진을 위해서 부숴 나가야 한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다. 쁘띠부르조아의 품속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자 하는 동지들에겐 어떠한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은 사치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사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의회의 계급성을 폭로할 것이며, 그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지금 내 귀에는 공장에서 권력까지라는 노래공장의 노래소리가 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