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신삼위일체론 설명 분석 정리

神學(Theologia)이란 말마디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에 대한 학문(thos-logos)이란 뜻이다. 그런데 신에 대한 논의는 세상과 인간을 배제하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신,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항상 세상과 인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출애급 사건). 또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신론의 출현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멸시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인간 개개인도 대부분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에서 신을 찾거나 거부한다. 이런 점을 살펴본다면 신에 대한 말은 구조적으로 인간의 현실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얘기하자면 현재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 세계는 ‘세속화’(Secularization)와 ‘해방‘(emancipation)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서구의 근대의 역사과정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전제한다. 17,18세기에 시작된 근대의 역사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쥐게되었다. 온갖 중요한 인간 생활의 영역이 교회의 영향권에서 물러나 인간의 직접 책임과 지배 아래 놓였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은 그야말로 “세속화” 되었다. “맹목적으로 신봉되던 권위와 부당한 지배에 대항한 인간의 자결(自決)”이란 의미로서의 “해방”은 “자연계의 강요와 사회적 강압, 그리고 아직 자기 정체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 자신의 내적 강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구 근대의 배경을 이루는 사상적 특징을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앙에 대해서 이성의 우위, 신학에 대해서 (인간에게로 전향한) 철학의 우위, 은총에 대한 자연(자연과학, 자연철학, 자연종교)의 우위, 교회에 대해 점점 더 세속화된 세상의 우위”를, 한마디로 그리스도교에 대항한 세속적 인본주의를 우위에 두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종교를 배제한 근대의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복리와 행복을 기치로 세우고 기술의 혁신과 정치-사회적 혁명이라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인간의 복리를 위해서 노력한 결과는 지대하다. 기술 혁신으로 인해서 기아와 각종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많은 불편을 덜어주었다. 또한 정치-사회적 혁명으로 인해서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노동운동에 대한 의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장미빛은 아니었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인간을 위해 기여한 것이 많았지만 폐해도 적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그 양면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주로 서방세계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는데 “발전 이데올로기”, 즉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이상적인 인간 사회를 달성한다는 신념은 발전의 긍정적, 부정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 오늘날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가 없다. 발전이념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결과를 수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기술문명에 대한 불안은 일반화된 상태이다.1)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전과 근대적 ‘세력들’, 즉 한계와 책임을 외면한 막강한 능력의 과학, 인간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는 막대한 기술체계,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 사회 정의를 소홀히 여기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의해서 해방이 아니라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근대의 세속적 인본주의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사회-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도 무너졌다. 사회-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조건을 퇴치하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맑스주의가 상당히 큰 인본주의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선포한 사회의 인간화는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실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비인간화를 낳았는데, 이로써 무력에 의한 정치-사회적 혁명이 저절로 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한다는 이념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2) 이렇게 볼 때 인간화를 내걸고 그리스도교에 도전하던 세속적 인본주의 스스로가 다시 인간의 이름으로 도전을 받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와같이 유사(類似) 종교의 역할을 하던 근대의 중요한 이념들이 흔들리게 되면서 사상적으로 방향 상실의 상황이 나타났지만, 다른 한편에서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종교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근대 후기 이래로 포이어바흐(L.Feuerbach), 맑스(K.Marx), 프로이드(S.Freud)는 종교가 결국은 소멸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3) 세속적 인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현재의 상황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전세계적으로 종교에 대한 새로운 개방성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New Age’) 또한 그 동안 신과 종교의 문제를 도외시하였던 다양한 과학분야와 이념체계 안에서 삶과 고통, 죽음 그리고 가치와 기준에 대한 질문, 그와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윤리와 종교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는 현상들을 발견된다.

맑스-레닌주의는 60-70년대에 인간 삶의 의미와 죄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와 함께 종교의 잠재적 의미가 새삼 노출되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에서는 그 자체의 방법론을 절대시하는 주장을 상대화하기 시작했고, 차츰 책임성있는 과학-기술 행동에 대한 의식이 자리하면서 윤리에 대한 문제, 또 그에 내포된 의미, 가치, 종교의 문제가 제기되었다(핵문제, 생명과학, 복제인간). 심층심리학은 인간 정신의 자기발견과 치유를 위한 종교의 적극적인 의의를 발견하였다. 근래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종교심의 쇠퇴와 현대의 전형적인 노이로제인 방향상실, 규범상실, 의미상실의 증가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4)

이렇게 과학과 기술, 산업이라는 근대의 대표적인 세력들이 더 이상 절대시되지 않고, 근대사상에서는 도외시되었던 종교에 대한 새로운 수용적 자세가 형성되는 새로운 상황(‘post-modern’)을 직시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진정한 인간화를 위해서 진정한 초월자와의 연관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실상 진정한 초월자와의 연결없이 진정한 인간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최근세사에서 뚜렷히 드러났다: 독일의 나치정권과 같이 ‘민족’과 ‘인종’을, 공산주의와 같이 ‘인민’, ‘노동계급’, ‘당’이라는 유한한 세계내적 요소들을 절대화하는 경우에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초월자의 존재, 즉 종교의 역할을 재고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된다고 하겠다.

종교를 거부하고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려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느님 신앙을 배척한 세속적 인본주의의 실패는 곧바로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공산주의의 몰락이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하느님 신앙이 인간의 행복과 복리를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탬이 된다는 것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어야만 현대인들은 그리스도교에 마음을 개방할 것이다. 더구나 세속적 인본주의의 출현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한 잘못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책무는 더욱 무겁다고 하겠다.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핵심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분명 현대 세계에 어떤 대안(代案)으로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보증이고 근거라고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의 고찰은 서구의 사상 변천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는 사상적으로 서구와는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서 서유럽에서처럼 무신론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래에 와서 종교의 성장속도가 둔화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종교 인구는 늘어가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명백하게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할지 몰라도 적어도 무신론이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이 된 적은 없다고 하겠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할 자세를 어느 정도는 다 갖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무신론이라기 보다는 기복신앙과 이기적 신앙 태도라고 하겠다. 종교의 이름으로 오직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재산 증식과 건강함, 편안함만을 찾으려는 이기적인 태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장의 필요 때문에 종교를 찾고, 그 필요를 충족해 줄 수 있다면 이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바꾸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유럽의 무신론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잘못된 신앙 태도와 무신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잘못된 신앙의 다음 단계는 무신론이다. 왜냐하면 무신론의 형성과정에서 보듯이 종교의 이름으로 개인적, 사회적으로 잘못이 거듭되면 아예 하느님 신앙과 종교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의 사상적 흐름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 안에 뿌리 깊이 자리하는 기복신앙의 무조건적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거듭되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 거의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이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신앙을 갖기 위한 출발점은 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한 발자욱 더 나아가서 타인도 생각하면서 자신을 쪼개 줄 수 있는 성숙한 신앙 태도로 나가느냐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하느님 신앙이 요구된다. 올바른 하느님 신앙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전수된다. 그런데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실천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