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족주의에 대한 단상

  1. 부적절한 것

그동안 민주노동당은 대체로 ‘황우석’ 신드롬 속에서 국익을 내세운 자못 파시즘적 광기에 ‘대체로’ 굳게 맞서왔다. ‘대체로’ 말이다.
조금 애석한 일이지만, 일부이나마 당원들 혹은 당의 책임 있는 인사가 이 파시즘적 광기에 대해 보였던 부적절한 관용적, 혹은 동조적 태도는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모습에 크던 작던 상처가 될 것이다.

황우석 스캔들은, 그 주요 인사의 면면에서 드러나듯, 생명공학 중에서 지금 첨예한 윤리적, 사회적 논란의 소지를 지닌 특정 분야의 (다국적인) 연구자 및 기업들의 이해관계와 한국 정·관계의 정치적(밑 기타의?) 이해, 그리고 언론의 담합에 의해 선동된 ‘반동적 대중동원’이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선동수단은 검증되지 않은 국익을 신성시하는 (경쟁적) 국가주의-민족주의였다.
즉 ‘진보’를 말하는 이들 중 일부가 동조했던 어떤 경향은 단지 반동적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경향이었다.
그것은 결국 특정 자본분파의 사적이해와 정략적 이해를 악의적 선동으로 관철시키려는 기도에 속한다. 그것에 동조한다는 것은, (약간 심하게 말한다면) 한나라당이나 일부 종교교단과 함께 사학법 반대 운동에 동조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33조’의 환상 속의 국익을 위해 여성들의 신체와 건강을 공양하고 논문위작을 눈감으라는 이야기나, ‘전교조 이념수업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볼모로 삼고 재단의 비리와 전횡을 눈감으라는 이야기나, 허구성과 비양심성에 있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결국 이번 줄기세포 스캔들은 자기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정경학언’ 복합체의 술수였을 뿐 아니라, 그 수단으로 파시즘적 대중동원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나쁜 짓일 뿐 아니라, 위험한 짓이었다. 진보적 사회세력에 있어서 이는 동조적 태도는 물론이오 관용이나 유보적 태도조차도 부적절할 뿐인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1. 파시즘은 파시즘이다.

그럼에도, ‘황우석 신드롬’에 동반된 애국주의적인 대중적 열광을 파시즘으로 (까지) 보아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다.
황우석 신드롬 속에는 파시즘을 연상하게 하는 여러 면모들이 존재했지만, 그 중 백미는 단연코 그것이 ‘집단적 피해망상’과 조장과 ‘증오의 선동’을 동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적인 폭력적 행동들, 사이버 린치행위들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그런 행동들을 고무, 찬양하는 상태까지 치달았다. 파시즘적 현상의 핵심은 지배적 폭력에 대한 대중의 공모이고, 집단적 피해망상과 그에 의해 격발되는 인격화, 특정화된 대상을 향한 증오의 선동은 그 공모관계의 핵심기제이다. ‘황우석 신드롬’은 그리고 바로 이 결정적인 면모에서 일치하는 DNA 피크를 보여주었다.

이쯤에서 그동안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해 보자.
이를테면, 과연 ‘난자기증꽃길’을 벌인 이들, 적어도 그 사건을 주도한 사람들이 그저 ‘난치병 환자를 치료한다는 숭고한 목적’만으로 진달래를 즈려 밟을 생각을 해 낸 것일까. 과연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연구윤리나 신뢰성 문제로 역풍에 직면하는 일이 없었어도 그들의 희생정신에 불이 당겨졌을까? 결국은 CIA까지 등장하고 마는 음모론적 주장들에 휩싸인 집단적 피해망상과 그것에 의해 격발된 ‘매국노 PD수첩’과 ‘조직적 음해세력들’에 대한 ‘증오 모으기’가 ‘난자 모으기’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파시즘적 경향은 증오를 대중적 열광의 소재로 바꾼다. 그것은 처음에는 ‘공동체’로부터의 배제의 공포에서 시작된 강요된 열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가학적/피학적인, 역설적인 쾌락을 동반하는 집단적 광기로 변형된다. 즉 사람들은 ‘황우석의 = 국가와 민족의 적들’을 증오하는 한 거의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결국 게시판에 욕설을 퍼붓고 비판자들의 신상자료를 인터넷에 뿌리며 협박을 늘어놓는 것이 ‘한국사람이라면 당연한 해야 할’ 애국적 행동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만났던 것은 파시즘이었다.

수많은 한국인들은 이제 단지 정경학언 복합체가 펼친 한편의 다국적 과학사기극 앞에서 그저 피해자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는 크던 작든 하나의 외상적 체험이 될 것이다. 그런 체험은 한번으로도 너무 많지만, 나는 이것이 일회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1. 국익바이러스와 면역결핍증

파시즘적 현상이라고 밖에는 표현 할 수 없었던, ‘애국주의적 열광’에 대해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적 사회세력 내부에서 있어서는 안될, 부적절한 동조적 태도가 발생한 원인은 사실 비교적 분명하다.
그 가장 중요한 하나는 아마도, 오늘날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민족주의의 과잉’을 객관적, 비판적 이해하는데 실패한 관성적이고 낡은 사고방식의 문제 또는 어떤 ‘인위적 실수’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 ‘황우석 신드롬이 언론과 기업, 정부에 의해 조장된 것’이었다는 점은 도리어 사실은 이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기업과 정부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였던가?

지금 문제는 그러한 ‘조장’과 ‘사회적 강제’가 우리가 흔히 정권을 ‘군사파쇼’라 부르던 시절의, 국가권력의 폭압적 수단을 통해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형태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월드컵을 즈음해서 그 조짐을 보였고, 노무현 정권 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업과 정부의 조장 하에, 지배세력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행위’가 파시즘적 함의가 다분한 반동적 대중동원을 그 주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우리가 ‘황우석 신드롬’을 통해 또 다시 등장한 어떤 경향을 ‘그저 그런 평이한 수준의 반동적 사건’이나 ‘일회적인 해프닝’으로 넘겨버릴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시 조우하게 될, 그리고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 무엇이다.

때문에 ‘대한민국 유일의 원내 진보정당’의 안에서조차 더러는 ‘황우석 신드롬’에 또 다시 반복된 그 무엇에서 파시즘적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어쨌든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말만으로 이 파시즘적 현상 앞에서 무원칙한 후퇴를 정당화하거나, 심지어는 일정한 동조적 경향까지 보였다는 것은 그다지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기저에 존재했던 ‘애국적 열광’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면역결핍증’ 역시 그렇다.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정말로 곰곰이 되짚어봐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