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 이야기에서 측별히 관심

엘리사 이야기에서 측별히 관심을 끄는 것이 둘 있다. 곧 엘리사가 하사엘과 만나는 이야기 (왕하 8:7-15) 와 나아만과 만나는 이야기 (왕하 5장) 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엘리사는 장차 반란자가 될 하사엘과 만났다. 이 둘 사이에 진행되는 매우 절제된 대화에는 정치적인 극도의 긴장과 인간적인 고뇌가 한 장면 속에 전율할 만큼 훌륭하게 녹아들어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예언자가 활약하는 모습을 아주 친절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다. 어떤 개인을 위해 목회적으로 이끌어주는 모습을 이 보다 더 보기좋게 묘사한 곳이 없을 정도이다.

왕하 5장의 개요에서 이미 아람 사람 나아만의 모습이 밝히 드러난다. 그는 국가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람이었다. 야훼는 그 모습을 보시고 아람 사람인 그에게도 도움을 베푸셨던 것이다. 다시말해 야훼는 올바른 사람을 돌보시며, 세상 속에서 그가 하는 행동을 축복하신다. 그렇지만 나아만은 문둥병자였다.

우선 이야기꾼은 하나님의 길이 숨겨져 있음과 하나님의 방법이 어처구니없어 보임을 – 이스라엘 출신의 하녀가 나아만을 구원하는 첫 동기로 작용한다 –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추구하는 길과 대조시킨다. 아람왕은 범국가적 행동을 유발하고, 외교적인 문서를 이스라엘왕에게 보내 나아만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아람 사람들은 신의 은사가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의 신분적인 사회질서와 전혀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이 사실을 몰랐던 듯하다. 그리고 이스라엘왕은 아람왕이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하느님으로 착각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지, 이건 싸우자는 이야기야!” 그래서 이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된 경위에 대한 묘사 (4-7절) 는 거의 풍자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물이 해소된 뒤에도 해결책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아만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에도, 서로 다른 입장이 또다시 충돌하였다. 엘리사는 그에게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자기 사환을 통해 아아만에게 전한 말은 장엄한 주문 (주문)을 잔뜩 기대하였던 그를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러한 기적탐 (탐 Wundersucht)부터 꺽어 놓으려 한 것이 분명하였다. 여기서는 한 가지 신화가 다른 어떤 것에 압도되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이 치유역사느 자기는 쑥 빠지고, 요단강물에 들어가라는 요구에 순종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아만의 치유는 이 이야기의 중심테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시말해 이 이야기에는 정점이 두 가지 있다: 나아만과 엘리사가 적대적으로 충돌하는 것과 그 뒤에 이어지는 화기애애한 대화이다. 치유사건 자체는 이 두 가지 정점 사이에 숨막히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엘리사에게로 돌아 왔다. 자기가 준비한 선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아주 냉정하게 보이는 엘리사에게 두 가지 요청을 하였다. 첫째는 노새 한 마리에 실을 수 잇는분량의 흙을 다마스커스로 가져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거기서 야훼에게 바르게 기도드리려는 것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나아만의 이러한 요청은 빈약한 신앙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철학적 전제를 보지 못한 것은 실수이다. 사실 이스라엘 안에서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분리시키려는 철학이 있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를 읽는 이는 흙을 가져가려는 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저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정신적인 것을 고양시키려는 나아만의 무능함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여기 이 사람 같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자기가 거처하는 이방세계에서도 어떻게든 하느님을 경배하려는 이 모습은 실로 감동적인 것이다. 사실 그도 (자신에게 야훼께서 주신 땅이 전적으로 구원의 선물이기에) 나아만이, 비록 낯선 방법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신앙이 위기에 처할 것을 감안하여, 어떻게든 거룩한 예식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질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늘 새롭게 진행되어야 할 성서적인 믿음과 그리이스 정신에 관한 대화에 저 노새 등에 실을 만한 분량의 훍이 주요한 역할을 해야하리라).

나아만은 또 다른 요청도 하였다. 곧 그가 직책상 자기가 섬기는 왕 옆에 서서 림몬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십계명 제일조에 비추어볼 때, 실로 난감한 문제였다. 나아만은 이방세계에 살고 있는 자신이 이방제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의 율법대로 그를 죽여야 하는가? 그가 겪는 갈등의 첨예성은 나아만이 이 물음에서 인간성 (Menschentum)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때에서야 비로소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말해 그는 종교를 마음 속으로 내면화 시키고 (in die Innerlichkeit des Herzens) 난 다음에 예배드리기를 외적인 상황에 따라 포기할 수도 있다는 현대적인 발상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긴장하며 기다렸던 엘리사의 대답은 뜻밖에 간결하고 절제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상당히 목회적인 인식이 거기에 담겨 있다: “평안히 가라.” 만일에 엘리사는 그 물음에 대답을 회피하였다거나, 안이하게 처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놓쳐버릴 것이다. 이 대답을 하면서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율법의 짐을 아무 것도 지워주지 않았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를 계명 (율법) 으로 무장시켜서 보내는 일은 아주 쉬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를 이방세계로 되돌려 보내면서 그와 그의 믿음을 그가 이미 예배드리기로 약속하였던 야훼의 인도하심에 내맡겼던 것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아주 엄격하였던 엘리사가 얼마나 관대하게 그를 떠나 보냈던가! 이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곧 나아만이 치유받는 이야기 저 건너 편에, 다시말해 이미 이야기된 것이 저 건너편에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는 일들이 이렇게 잘 풀려나갔지만, 이야기꾼은 끝으로 엘리사의 측근에게서 일어난 슬픈 좌절을 보도하고 있다 (20-27절). 그러나 여기서도 욕심많은 거짓말쟁이 게하시에 비해서, 떠나가는 나아만의 모습에는 다시한번 친밀한 빛이 빛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