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물론의 기능변화 – 투쟁의 수단이자 미래사회의 청사진으로서의 역사유물론

“지금까지 역사유물론은 분명히 훌륭한 투쟁수단이기는 했지만 학문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단순한 프로그램, 요컨대 역사는 어떻게 기술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지금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을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분류·평가하여 전 역사를 진정으로 새롭게 써야 할 과제를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유물론을 구체적인 과학적 연구의 방법으로, 즉 역사과학의 방법으로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겠다”(313).

“부르주아지의 역사방법과는 반대로 역사유물론은 동시에 현재를 역사적 시각으로, 따라서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것, 즉 현재 속에서 표면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현실의 사건들을 움직여 가는 보다 심층적인 역사적 원동력까지도 함께 보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단순한 과학적 연구의 한 방법으로서의 가치보다는 훨씬 더 큰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투쟁수단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동시에 그들의 계급의식의 각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급의식의 각성은 어디서나 그들이 진정한 상황, 즉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적 연관을 인식한 결과로서 나타났다”(314).

“역사유물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의 본질을 폭로하는 일이다….그러므로 역사유물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순수한 과학적 인식의 기능이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서의 기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유물론은 결코 자기목적[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상황을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명백하게 인식된 상황 속에서 그들의 계급상황에 알맞게 올바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했었다”(315).

“공황의 구분, 그 단계 및 등급, 이러한 단절점이 가진 역동적 의의, 경제를 다시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힘의 강도 등등도 역시 부르주아지의 (내재적인) 경제학의 입장에 의해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역사유물론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질서의 ‘최대의 생산력’인 프롤레타리아트가 공황을 단순한 객체로서 경험하는가 아니면 결정의 주체로서 경험하는가 하는 점에 결정적인 비중이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 프롤레타리아트의 수동성 때문에 –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이 죽은 점[공황]을 극복하고 기계를 다시 작동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최종적’ 공황이 그 이전의 공황들과 질적으로 다른 점은 그 넓이와 깊이, 즉 그 양이 질로 단순히 전화된다는 점은 아니다. 또는 더 적절히 표현한다면 이러한 전화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공황의 단순한 객체이기를 그친다는 데서 나타난다. 즉 그 개념상 이미 부르주아 생산질서와 프롤레타리아 생산질서 간의 투쟁, 사회화된 생산력과 개별적·무정부주의적 형태의 생산력 간의 항쟁을 의미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인 적대관계가 공공연히 전개된다는 데서 나타난다.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의 목표는 항상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이 자기 계급에게 미치는 파멸적 영향을 깨부수는 것”이었다”(337-8).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는 – 지배의 소명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통하여 – 자신의 역사를 의식적으로 자기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이는 객관적·경제적 과정의 ‘필연성’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 다른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필연성’이 과정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는 요소였다. 그렇지만 이제 필연성은 하나의 장애물로 되었고 극복해야 될 것으로 되었다…. 경제적 불가피성의 경향을 인식하는 것은 더 이상 이 <경제적 불가피성>의 과정을 가속화하거나 이 과정으로부터 이익을 얻어내는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 과정과 효과적으로 투쟁하고 그것을 되밀어내며 가능하다면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거나 그것을 회피하는 기능을 가진다. 이 때 수행되는 변혁은 경제적인 변혁(그리고 이것에 의해 조건지워진 계급구조의 재편성)이다. 그러나 이 ‘경제’는… 그 내재성과 자기법칙성을 잃어야 한다. 경제는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무엇보다도 우선 이 이행 도중에 경제와 폭력[강제력] 간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지양, 이와 같은 비약은 하나의 과정이다…. 비약이란 곧, 그 ‘경제’가 인간과 인간의 욕구에 종속되어 있는 그런 의식적으로 통제된 사회가 갖는 근본적인 새로움으로 직접적으로 전회하는 데 있다”(344-6).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이미 개시된 이행의 시기에는, 비록 우리 앞에는 지극히 멀고 험한 길이 가로놓여 있다 해도, 역사유물론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중요한 투쟁수단으로서의 의의를 변함없이 유지할 것이다…. 투쟁이 이러한 단계로 돌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유물론의 기능에 두 가지 극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생산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길, 대상화된 사회적 힘들의 강제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어떻게 가야만 하는지가 유물론적 변증법에 의해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모든 위기는 자본주의의 자기비판의 객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극도로 긴장된 위기는, 자본주의의 자기비판을 완성한다는 이러한 입장에서 역사유물론을 ‘인류의 전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마무리할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