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과 국익론

즉, 앞으로도 우리는 파시즘적 경향이 다분한 반동적 대중동원을 동반하는 우익 포퓰리즘과 그것을 통해 지배집단의 (계급적 혹은 계급분파적) 이해를 관철하는 정치형태와 종종 만나게 될 것이다.
이미 노무현 정권동안 우리는 그런 ‘우익 포퓰리즘’적 정치행태를 적잖이 보아왔다. (그뿐 아니라 그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이다.) ‘귀족노조’라는 파시즘적 대중선동을 통해, 부안에서 경주까지 주민들의 증오와 반목을 주된 추진수단으로 삼았던 ‘국책사업’들을 통해, 김선일씨의 주검 앞에서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한 피해망상을 앞세우고 뒤로는 희생자를 매도하던 패륜적 행동을 통해서 말이다.

그 속에서 ‘국익’을 모든 것의 면죄부로 강매하는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이런 반동적 대중동원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원천의 하나였다.
현재의 시점에서 지배집단이 민족주의를 정치적 수단으로 애용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도리어 지배집단이 국가주의-민족주의를 통한 허구적 통합을 애용하게 만들 객관적 조건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 한가지이다. 국가주의-민족주의에 대한 ‘항체’ 없이는 제대로 된 진보세력 구실을 하기는 더욱 더 어려워 질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는 ‘7-80년대, ‘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성장했던 한국의 진보진영이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대체로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민족’, 혹은 ‘민족주의’가 어떤 자연적인 것이 아닌, 구상되고 제작된 것임을 ‘알고는 있다’. 이제 그 앎을 실제적인 생각의 수단으로 작동시킬 때이다. 다른 누가 아니라, 우선 스스로에게 말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편애에서 벗어나자는 말은 보통 ‘계급적’ 혹은 ‘시민적’ 원칙의 우위를 주장하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그것이 많이 틀린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민족’이 있던 자리에 곧장 ‘계급’이나 ‘시민’이라는 단어를 채워 넣는 것은 생각보다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이유는 ‘개인’의 문제이다.

계급적 운동, 혹은 시민적 합리성은 한가지 공유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연합 혹은 결사’라는 원리이다. 즉 그것은 언제나 ‘자율적, 독립적인 개개인들의 자발적 결연’을 통해 구성된 집합적 행위자로서 스스로를 간주한다.
반면 ‘민족’이나 ‘인종’과 같은 ‘(의사)종족적’ 범주들은 언제나 그 자신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미 전제되고 주어진 집단성의 형태가 있고, 상징적 정체성을 나눠 받은 ‘개별 구성원들’이 그 뒤를 따른다.
종족적 원리와 연합적 원리는 정반대의 구성적 원리이고, 그 핵심에는 ‘개인’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현실적, 물리적 존재형태로서 ‘개인들’의 ‘고유성과 보편적 존엄성’에 대한 전제가 없다면, 종족적 원리에 대한 연합적 원리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고유성, 존엄성’에 대해 ‘개인주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읊기 전에 ‘좌파’들이 지난 200년간 주장한 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해 보는 쪽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 “당신의 피고용 노동자들과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당신이 좋아하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허 하라!”
어차피 부르주아들이 가장 열심히 주장했던 것은 사회적 권력의 공간적 구분으로서 ‘사적영역’의 예외성과 특권이지, 자연인으로서 현실적 개개인들의 권리나 존엄은 아니지 않았던가? 심지어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보통선거권 조차 부르주아 사회가 흔쾌히 내준 선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동안 ‘사회주의는 (자연인으로서) 개인의 권리를 반납한 집단주의’라고 이야기하던 정부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유물의 자격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때문에 좌파라는 것은 당신의 일기장을 집회에 꺼내놓고 자아비판 하는 조선일보식 패러디의 주인공이 아니라, 아이들의 일기장을 부모와 교사가 검사하는 기묘한 숙제가 인권침해임을 따지는 사람이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보통 그러하듯, ‘개인의 존엄과 자율에 대한 존중’도 대체로 결국은 좌파의 몫이 된다는 점이다.

신분제를 폐지하고 여성들을 교육시키면 부국강병의 길이 열린다고 ‘반상의 법도’를 폐지하고 여학교를 지었다. 어디까지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근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다음의 역사는 식민지였고, 그 다음은 전쟁과 냉전하의 준-전시국가였다. 개인은 언제나 ‘개인의 권리만을 너무 주장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문장을 통해서만 등장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국 자본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침묵 당한 노동자들을 통해 폭리를 취하며 번성해 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부르주아와 그들의 정치적 동반자들에게 개인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의미 있는 성과를 대체로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덧붙여, 세계적 범위에서도 법인자본주의와 더불어 위세 당당한 영웅적 개인은 실종 된지 오래이고, 그 자리에는 사회의 기술관료화 속에서 웅크린 카프카 풍의 개인들만이 남았다.
게다가 정보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개인의 권리나 프라이버시보다는 감시카메라나 위치 추적 혹은 (개인정보의 수집을 통해 타깃을 특정화한)’밀어 넣기 광고’나 스팸메일 같은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한가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대기 중 미세먼지’ 만큼 곳곳에 퍼진 한국사회에서, 그것에 ‘그들’만 감염되고 우리는 멀쩡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현실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의 오류들을 감추기 위한 호교적 주장들이 우리의 수업시대를 채웠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사상의 자유부터, 작업장 안과 밖에서 노동자들의 프라이버시나 네트워크 상의 개인정보의 문제, 군대내의 인권, 교육공간에서 피교육자들의 권리 등등 온갖 수준의 구체적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를 가장 열심히 상대하는 것은 진보세력 즉 좌파들의 일이다. 그것도 대체로 자본에 대항해서 말이다.
게다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는 반복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당연히 우리는 이 개인의 권리들과 함께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미래로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허명의 존재들과 그 영광의 그늘아래 고통받던 현실의 삶을 사는 구체적 개인들에 대한 연대와 공감이 당연히 우리의 출발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국익의 이름으로 들끓던 파시즘적 소동을 앞에 놓고, 그것이 파시즘임을 알아채는 것조차 시간이 걸리는 감수성이 되어 버렸지만.
폭력적 국가주의와 그것에 보호받는 야만적 자본주의에 맞서 시작한 길에서 ‘국가사회주의’의 ‘어용 사상’을 공부해야 했던, 그런 역사의 뒤틀림 속에서 어느 순간 놓치고 말았던 그 무엇. 그것을 이 기회에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게다가 오늘 황우석 신드롬 속에서 만난 파시즘적 경향이 그저 일회적인, 지나가 버린 일은 아닐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 말이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내부에 잠재된 파시즘적 충동에 대한 치료제가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우리의 면역력은 높여준다면 말이다.